남자 스타

양준일 나이 키 프로필

킴샤방 2020. 3. 16.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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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준일 프로필

 

출처-https://www.instagram.com/jiytime/

이름 : 양준일

출생 : 1969년 8월 18일 베트남 공화국 사이공

국적 : 미국

출신 : 미국 캘로포니아 주 로스엔젤레스

학력 :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학사

가족 : 부인, 아들

신체 : 178.4cm

데뷔 : 1991년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병아리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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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교포 출신의 가수. 1990년 11월 <리베카>를 타이틀곡으로

한 1집 앨범으로 데뷔했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활동이 없다가, 2001년에는 V2라는 혼성 그룹으로 잠깐 다시 활동한 후 연예계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데뷔 30여년 후인 2019년에 유튜브를 통해 과거 영상의

춤, 노래, 패션 등의 다양한 모습들이 재조명 받게 되고 슈가맨을 통해 양준일 신드롬을 만들어내며

다시 미국에서 한국으로 소환되었고 현재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인 부모를 따라 베트남에서 출생하고 홍콩, 일본, 한국에서 살다가 9살 때 미국 LA로 이민을 가서 정착했다.

어린 시절 조용한 성격이지만 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또래 아이들이 시비를 걸어 다투는 일이 있었지만,

중학교 시절에는 춤을 잘 춰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할리우드 1세대 한국 배우이자 교수인 고 오순택과의 식사자리에서

'너는 한국이나 일본에서 자랐으면 연예인이 됐을 아이'라는

말로 가족들 모두 충격을 받고 식사자리를 마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고등학교 2학년 재학시절 친구와 함께 오른 무대에서

음악에 재미와 흥미를 느껴 본격적으로 가수를 준비하게 된다.

USC에 재학 중에 이범희의 눈에 띄어 한국에서 데뷔했다.

1집은 아세아레코드 2집은 서울음반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1991년 MBC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신인 가수들을 위해 마련된 '병아리 무대'를 통해 공중파에 데뷔했는데,

이 때 당시 동시에 무대에 섰던 가수로 심신, 윤상, 박정운 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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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자체는 동시대의 다른 한국 가요에 비해 상당히 미국에 근접해 있어서 좋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만 마른 몸에 큰 키와 긴 머리, 지나친 미국식 퍼포먼스,

노래에 심히 몰입해서 정신 없어 보이는 춤 등은 1990년대 초반의 코드와 맞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호불호가 많이 갈렸다. 당시 트렌드에 맞지 않아 대중적인 성공은 거두지 못한 케이스.

당시 미국 팝계의 뉴 잭 스윙, 하우스 음악 트렌드를 가요에 이식하려 시도했다.

뉴 잭 스윙 음악은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 1집, 동년 8월 현진영 2집을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으며

본격적으로는 1992년 11월에 발매된 양준일 2집 앨범과

1993년 4월 발매된 듀스 1집을 통해 한국 가요에 접목되었고,

터보나 룰라가 춤의 트랜드를 일부 계승하면서 본격적으로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그 당시 <리베카>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표절곡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리베카의 원곡은 이범희가 작곡한 '전원의 이별'이란 곡으로 1987년 발매된 이명호의 2집 앨범과

1988년 발매된 모아모아의 앨범 〈방황의 끝〉에 수록되어 있다.

'전원의 이별'에서 편곡을 거친 후, 양준일이 새로 가사를 쓴 것이 리베카다.

다른 활동곡들인 <가나다라마바사>, 는 양준일이 직접 작사/작곡한 곡들이다.

당시 다른 방송사들에서 양준일에 대해 보수 시각 일색이었던 것과는 달리,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서울방송(SBS)에선 양준일을 열심히 밀어주었다.

당시 SBS의 간판 음악 프로그램이었던 쇼! 서울서울에서는 반고정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등장했으나,

당시 서울 등 수도권에서만 본방송으로 시청 가능했던 한계

그리고 극과 극으로 갈렸던 대중의 반응 때문인지,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또한, 중간중간 콩트 설정으로 진행하는 과정에서도

언어 문제로 웃기만 하자 MC 정재환에게 '말 좀 하세요.'라며 핀잔을 듣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SBS를 포함하여 의외로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

다만 당시 방송가는 교포 출신으로 한국말이 서투른 양준일의 어리숙한 면을

희화화시켜 양준일의 이미지를 많이 소모시키는 역할로만 활용하였다.

현재 시각에서는 충분히 출연자를 배려하지 못한 것에 비난을 받을 요소가 충분하지만,

당시 보수적이었고 큰 방송사가 세 군데만 있었던 환경이었기 때문에

양준일로써는 자신의 노래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양준일은 방송 출연을 통해 자신의 노래를 홍보할 수 있기 때문에 모욕감을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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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당시엔 느끼하고 이상하다는 평가가 많았고,

2집 타이틀곡 <가나다라마바사>의 중반부에는 양준일 스스로

여잔지 남잔지 모르겠다”등 세간의 평가를 셀프디스했다.

1990년대 초반 당시의 미남 기준이 지금과 다소 다른 것도 있지만,

기생오라비’라 불리우는 여린 미형 외모에 마른 체구,

특히 긴 파마머리까지 한 그는 기성 세대들에게 좋지 않은 인식을 주기 쉬웠다.

패션 또한 지금 보기에도 촌스럽지 않게 잘 입었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엔 단정하지 않게 보였고,

여기에 방방 뛰어다니며 생소한 장르의 음악을 불러대니 대놓고 좋아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오늘날에 와서야 재평가의 요소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1~93년에 활동하였고 엇갈린 시선과 함께 크게 뜨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가사 또한 한계가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나 H.O.T를 보면,

가사가 당시 10대들에게 공감가는 면이 많다.

순정적인 가사는 물론, 당시 한국의 교육 실태에 대한 적나라한 비판 등.

하지만 양준일은 재미교포 출신답게 정서적으로 붕 뜬 가사를 적었다.

역시 많은 외국어 가사에 같은 가사가 반복되니 마치 클럽음악처럼 느껴질 뿐,

딱히 10대들에게 정서적으로 와닿지가 않았던 단점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양준일은 신선하고 파격적이라는 평가는 받았지만,

깊게 공감하며 열광하지는 못하고 정서적 거리감으로 인해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1993년 철이와 미애 2집 <뚜벅이 사랑>, <이별 후유증> 등을 작곡하고 프로듀스했다

비록 큰 호응을 얻지 못했지만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던 양준일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공연 비자 연장을 불허함으로 인해 가수 활동에 차질을 빚게 되면서 가수활동을 중단하게 되었고,

양준일은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 와중에 부모님이 하던 부동산 중개 사업이 큰 타격을 입게 되면서

양준일은 패션 감각을 살려 의류사업을 하게 되었다.

쟈이 컬렉션(JIY Collection)이라는 이름으로 양준일이 미국에서 소량으로 의류를 떼오면

한국에서 가족들이 매장에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일종의 한정판과 같은 소량 판매 정책으로 구매자들의 호응을 얻었고,

1997년 금융위기가 오기 전까지 4개까지 매장을 확대했으나

결국 IMF에 금융구제를 하게 된 시기에 사업을 접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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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되었던 양준일은 여러 지인을 통해 컴백 의지를 드러냈으나,

기존 양준일의 이미지에 거부감을 가진 음반제작사에서 제작을 꺼리자,

양준일은 머리를 확 치고 벌크업을 한 몸매로 가꿔 과거의 양준일의 이미지를 감춘 채

'JIY'의 프로젝트 그룹 V2로 컴백하게 된다.

이러한 외형상의 모습 변화로 인해, 당시에 보컬이 양준일인가로 설왕설래가 있을 정도였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V2의 정규 1집인 를 발매했으나,

당시 양준일이 계약했었던 소속사가 사기 문제에 휩싸이면서 양준일의 활동에도 차질을 빚게 되면서,

노래 호응은 좋았지만 적은 방송활동으로 인해 노래를 부른 가수는 기억나지 않게 되었고,

양준일도 이 앨범을 끝으로 가수 활동을 중단했다.

당시 타이틀곡인 Fantasy의 무대는 물론 가사 또한 매우 독특해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사는 "그녀가 떠나는 꿈이었어. 빨래를 걷어야 한다며 기차 타고 떠났어.",

그리고 같은 앨범의 의 "너 오브가 코스지" 등.

또한 과 는 가사가 독특하게도 한국 가요임에도 불구하고 영어로만 이루어져 있다.

V2 활동 시기에도 소속사와 계약에 문제가 있었으며 슈가맨에서

본인이 언급하기로는 계약서에 하면 안 된다는 조항이 많았으나

영어를 가르치면 안 된다는 내용은 없었기에 은퇴 이후에는 일산에서

가정집에 아이들을 초대해 공부하는 공부방 형식으로 14년 동안 영어 강사로 활동했다.

특이한 학습 방법으로 영어교육을 접근하였으나,

입시 위주의 학습을 선호하는 풍토로 인해 그다지 좋은 반응은 얻지 못했다고 한다.

양준일의 학습법은 훗날 양준일의 팬미팅에서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에 현재의 부인을 만나서 2006년에 결혼하고,

결혼생활 10년 만인 2015년 뒤늦게 늦둥이 아들을 가지긴 했지만

하술한 내용과 같이 결국 영어교육 사업도 접고 부모님이 계신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재미교포인 양준일과는 달리 부인은 순수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미국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고,

가장으로써 생계를 유지해야 했지만 많은 나이에 새 직장을 찾는데 힘들었기 때문에

슈가맨 3에 소환되기 전까지 레스토랑 카운터 직원, 창고 화물 운반업 등을 전전하다

플로리다 주 브랜든의 한국식당에서 서빙 활동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갔다.

출처-https://www.instagram.com/jiy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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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활동

정규 1집

겨울 나그네

 

발매일

1990.11.30

트랙 제목
01 겨울나그네
02 헬프미 큐핏
03 오월의 교정
04 리베카
05 강변의 한 사람
06 재수생
07 졸업과 이별과 친구
08 So insane

 

정규 2집

나의 호기심을 잡은 그대 뒷모습

발매일

1992.11.01

트랙 제목
01 나의 호기심을 잡은 그대 뒷모습 (Do It To Me)
02 Dance with me 아가씨
03 Party Invitation
04 가나다라마바사(Pass Word)
05 추억만의 사랑 (Love And Memories)
06 J에게 (To J)
07 그리움 (What I Had In Mind)
08 추억만의 사랑 (Love And Memorise) (Inst.)

 

V2 정규 1집

Fantasy

 

발매일

2001.04.17

트랙 제목
01 Fantasy
02 Good-Bye
03 True Love
04 Do You Speak English?
05 너의 이유
06 외로움
07 왔다갔다
08 우리만의 여행
09 Oh My God
10 Because
11 Fantasy (Remix)
12 Do You Speak English? (Remix)
13 Good-Bye
14 True Love

출처-https://www.instagram.com/jiy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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